히가시노 게이고의 [게임의 이름은 유괴]를 읽고 - 반전, 결말, 그리고 나만의 후기
요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추리소설에 푹 빠져 밀리의 서재까지 가입하며 소설 읽기에 몰두하고 있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건 제목과 표지가 너무 강렬해 홀린듯이 찾아 읽었었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라는 제목은 유괴를 소재로 다루는 건 너무나 명확했는데, 유괴를 게임에 빗대었다? 어떤 느낌일지 감이 잘 오진 않았다. 유괴를 하는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 심리적 기싸움을 게임에 비유한 것인가? 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역시나 한 수 위에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사쿠마' 바로 유괴를 한 범인이고, 유괴를 당한 인물인 '주리' 주인공과 모종의 이유로 유괴를 당한 척 연기를 하게 된다. 주리의 아버지인 '가쓰라기 가쓰토시'는 닛세이자동차의 부사장으로 주인공 사쿠마의 프로젝트를 묵살시키고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하여 사쿠마의 원망을 사게 된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사쿠마는 본래 완벽주의자 성향을 보인다. 어떤 일이든 꼼꼼히 끝내려 하고, 자신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인물이다. 매일 아침마다 운동도 열심히 하며 (나름 자신만의 루틴도 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이 시대의 직장인의 모습을 보인다. 남들은 모르게 숨겨온 가정사도 있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으며 염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유괴'라는 게임에서 사쿠마는 완벽주의자 성향답게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다. 가쓰라기 가쓰토시에게 보내는 팩스, 메일 하나하나 신중하게 보내며 경찰의 개입 여부와 동선까지 철저히 예측하여 가쓰라기에게 여러 지시를 내린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결국 가쓰라기로부터 주리의 몸값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주인공에게 인질로 사로잡힌 인물인 주리는 가쓰라기 가쓰토시의 딸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애인의 딸'이다. (전 부인도 아니고 전애인?...) 그래서 현 부인과 딸인 가쓰라기 치하루에게 그닥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대학생이고 꽤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나온다. 예쁜 외모때문일까 결국 나중에 사쿠마와 주리는 서로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잠시 혼란에 빠지는 때가 온다. 이때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말이 한 챕터의 주제로 나온다. 이때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본문에도 설명이 나오고 간단히 말하면 범인과 인질 간에 심리적 압박으로 인한 순간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종이의 집]에서도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가쓰라기 가쓰토시는 앞서 말했듯 닛세이 자동차의 부사장으로 높은 직급에 걸맞는 카리스마, 눈썰미, 위엄을 보이는 인물이다. 사쿠마에게 모욕감을 주기도 하는 인물로 일처리에 있어서는 매우 단호하다. 그러나 딸이 유괴된 후로 가끔 회의에 참석하지 않거나 당황하며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모습을 사쿠마가 가끔씩 보며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한다. 과연 경찰에 신고는 한걸까? 딸이 유괴당한 상태인데 어떻게 이렇게 태평하게 회의에 나올 수 있는거지? 하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이 복선이었고, 반전의 밑밥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전을 예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전
이 소설의 반전은 딱 하나이다.
하나이지만, 그 하나가 워낙 커서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하다.
처음엔 주리가 자신의 집에서 담을 넘어 가출하는 모습을 사쿠마가 보게 된다. 이를 보고 사쿠마는 주리를 쫓아가 어쩌다 가출하게 된 건지 상황을 듣는다. 집안에 실증이 나서 그랬던가 어쨋든 이를 들은 사쿠마는 주리에게 거짓 유괴를 꾸며내어 가쓰라기로부터 돈을 받아내자는 제안을 한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는 주리에겐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고, 둘다 가쓰라기 집안에 원한이 있는 상태이니 금방 협력 관계가 된다. 가쓰마는 당장 자신의 프로젝트를 갈아엎어버린 가쓰라기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맞으니 둘은 금방 가까워지고, 바로 작전을 실행한다.
처음 수상했던 건, 주리가 핸드폰을 두고왔던 것이다. 자기 딴에는 급하게 나왔다며 핸드폰을 두고 왔다곤 하지만 그 이유가 부자연스러웠던게 원래 가출을 하면 당연히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서 나와야 하는게 아닌가? 아무리 충동적이었어도 핸드폰을 챙기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까? 위치추적도 핑계를 댈 수 있겠으나 위치추적은 꺼버리면 그만이다. 장기적으로 집을 나갈 계획을 세우고 가출한게 아니라 충동적으로 나왔다면서 핸드폰을 두고 나오는 게 앞뒤가 맞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다음으론, 친구의 집에 실수로 남겼다는 부재중 메시지였다. 이 부분에서 가장 어색했던 느낌을 받았다. 유괴 게임을 시작하고 주리는 줄곧 사쿠마의 집에서 생활한다. 사쿠마가 여느때처럼 출근해있을 때, 주리가 어떤 이유로 친구 집전화에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전화를 받진 않았지만, 부재중 메시지가 남았다. 분명 그땐 주리가 유괴된 상황인데, 태연하게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집전화에 부재중 메시지가 남는다면 시간적으로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주리는 친구가 지금은 집을 비운 상태라며 사쿠마에게 친구 집에 가서 이를 지우고 오자고 제안한다. 이때부터 뭔가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과연 실수였을까? 그리고 이 친구에게만 전화를 걸었을까? 다른 사람에게도 걸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게 복선일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친구네 집 쪽으로 사쿠마의 차를 몰아 같이 오게 되었다. 주리는 따로 친구 집으로 간다고 했다. 몰래 같이 가서 빠르게 지우고 오는게 낫지만, 여성 전용 맨션이라는 이유로 사쿠마는 그냥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따로 기다리기로 한다. (여성 전용 맨션이라고 언급된 것도 뭔가 이상했다) 사쿠마가 주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마침 사쿠마의 차에 누가 스프레이로 장난을 쳤다. 이를 직원이 알고 사쿠마에게 얘기하며 소란으로 번질 뻔했지만, 사쿠마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며 그냥 스프레이를 대충 지우고 넘어간다. 뭔가 사건 자체가 되게 갑작스레 일어난 것 같아 이 사건의 의미가 뭔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나중에 이때 생긴 스프레이 자국때문에 경찰에 꼬투리를 잡히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나? 했으나 그런 쪽은 아니었다. 어쨋든 복선은 맞았다...!
이밖에도 둘이 언덕에서 관계를 하고 콘돔을 자기가 처리하겠다며 나서는 주리의 모습이나, 아무렇지 않게 사쿠마와 쇼핑을 하러 가거나 머리 색을 바꾸는 주리의 모습, 그리고 가쓰라기와 범인 대 피해자로 전화하며 가쓰라기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할때 가쓰라기가 한번 "경찰에 신고하진 않았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을 받았었다.
결과적으로, 작품의 가장 주요한 반전은 사실 주리가 주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쿠마가 가쓰라기로부터 성공적으로 돈을 받고 주리와 헤어진 뒤에 알게 된다.
어느날, 사쿠마의 회사에서 가쓰라기의 딸인 주리가 실종되었다는 뉴스를 직원들이 보게 된다. 사쿠마가 이에 관심을 가지며 뉴스를 봤는데, 분명 자신과 함께 있던 사람의 모습을 기억할텐데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도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일단 일차적으로, 나는 그럼 그때 가쓰라기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주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 집을 털려고 했던 도둑인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가쓰라기 집안의 가정사를 잘 알리가 없었다.
여기서 이어서 그렇다면 가쓰라기 집안의 가정부나 이와 연관된 사람 쯤으로 생각했는데, 또 그렇다기엔 나이가 대학생 쯤이고 결정적으로 가쓰라기가 주리 (라고 불렸던 누군가)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통화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결국 남은 한 사람은 바로 주리의 동생인 '치하루'였음을 알게 됐다. 지금까지 사쿠마와 함께 있던 사람은 주리가 아닌 그녀의 여동생 치하루였던 것이다.
게다가 치하루는 처음부터 핸드폰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빠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가쓰라기가 평소처럼 회의에 참여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몇 가지가 생겼다.
먼저, 왜 치하루는 주리인 척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주리라고 속일만한 이유가 없었다.
또, 가쓰라기는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어쨋거나 딸이 유괴된 상황인데 말이다.
치하루는 사쿠마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긴 했는가 등등 정말 다양한 의문점이 뒤섞여 머리가 아파왔었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답은 바로 '치하루가 집을 나온 순간 이미 주리는 죽어있다'이다.
치하루가 주리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치하루가 우발적으로 주리의 가슴팍을 가위로 찌르며 죽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치하루는 도망쳐나왔고, 사쿠마를 만나서 처음에는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 거짓말로 주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쿠마가 유괴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자 이를 들은 치하루는 좋은 방안을 생각해낸다. 바로 자신이 죽은 주리인 척 하면서 사쿠마에게 주리를 죽인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치하루도 은근 계획적이고 약삭빠른 인물이다. 사쿠마를 따르는 척하면서 뒤로는 아빠와 연락하며 사쿠마에게 죄를 덮어씌우게 하려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게된 가쓰라기도 계획을 짜며 사쿠마를 범인으로 만들 궁리를 한다.
스프레이를 뿌렸던 건 종업원이 사쿠마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관계 후 치하루가 챙긴 사쿠마의 정액은 주리의 시신에 묻혀 범인으로 몰아가기 위함이었다.
치하루의 친구도 사실은 그냥 예전에 알던 친구로 둘러댄 것이고, 친구의 집에 찾아간 것도 원래는 아빠의 창고였다. 사쿠마는 같이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작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마지막 챕터에는 사쿠마의 집에 몰래 있던 치하루가 사쿠마에게 나타나며 모든 일의 전말을 말해주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내용을 말하며 사쿠마와 치하루는 와인을 마시는데, 사실 그 와인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었다.
이를 몰랐던 사쿠마는 잠들게 되고 눈을 떠보니 그 자리엔 가쓰라기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쿠마는 가쓰라기와 이 사건에 대해 직접 얘기하며 유괴 게임의 승자는 가쓰라기인 것처럼 보였다.
사쿠마는 정말 치밀했지만, 가쓰라기는 사쿠마의 그런 치밀함 덕분에 자신이 이런 계획을 짤 수 있었다면서 사쿠마를 끝까지 못살게 군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하나 남아있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히든 카드'
사쿠마는 마지막으로 가쓰라기에게 자신이 컴퓨터에 띄어놓은 파일을 보라며 고갯짓을 한다.
이를 가쓰라기가 쳐다보면서 작품은 막을 내린다.
원문을 그대로 가져오면,
사진이 한 장 거기 떠 있었다.
사진에 찍힌 배경이 이 집이라는 것(사쿠마의 집)은 누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주리로 행세하던 때의 치하루가 나를 위해 준비한 요리를 쟁반에 얹어 나르고 있었다.
후기
마지막의 마지막 반전은 어느정도 예상했었다.
중간쯤에 카메라로 주리를 찍는 모습과 함께 주리가 다가오자 황급히 메모리 카드를 숨기려 셔츠 윗옷주머니에 메모리 카드를 넣는 모습이 묘사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뭔가 나중에 쓰일 것 같다 했는데, 마지막 히든 카드였을 줄은 몰랐다.
유괴라는 소재를 정말 참신하게 풀어낸 거 같아 읽는 내내 작가의 발상에 감탄하였다.
완벽주의자 사쿠마가 정말 다양한 변수를 대비해내는 모습이나, 자꾸 주리가 변수를 만들려는 것만 같은 행동을 보이는 모습 등 작품에서 밀당을 정말 적절하게 잘했던 것 같다.
아쉬웠던 점은, 사쿠마의 직장 동료 등이나 여러 인물들과 반전이 조금 더 얽혀 있을 줄 알았으나 정말 정직하게 사쿠마, 치하루, 가쓰라기 이 세 인물 사이에서만 관계가 얽혀 있어 추리의 재미는 다소 반감되었던 것 같다.
그러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다는 걸 알기에, 아쉬운 점보다는 반전의 재미가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예측했던 부분이 나왔을 땐 짜릿함이, 예측 못했던 부분이 나왔을 땐 서늘함이 아주 적절히 느껴지는
완급조절이 가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던
한번 이야기에 빠져들면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들었던
그런 책이었던 것 같다.